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13화 - 출발

우주관리자 2026. 2. 21.

제13화 - 출발

 

 

 

1.

 

월요일 아침, A사 물류센터 확장공사 현장.

 

차명호는 현장소장 김태호의 호출을 받고 컨테이너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김태호 외에 양복을 입은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명호 씨, 앉아요."

 

김태호가 자리를 권했다. 명호는 긴장한 채로 의자에 앉았다. 양복 입은 남자가 누군지 몰랐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분은 HELIOS 프로그램 본부에서 나온 정재혁 팀장이에요."

 

"안녕하세요, 차명호 씨."

 

정재혁이 손을 내밀었다. 명호는 어색하게 악수를 했다.

 

"무슨 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정재혁이 서류를 꺼냈다.

 

"차명호 씨를 HELIOS 프로그램 정규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습니다."

 

명호의 눈이 커졌다.

 

"정규... 직원요?"

 

"네. 지난 두 달간 명호 씨의 현장 성과를 검토했습니다. 굴착기 문제 해결, 지질 데이터 검증, 그리고 무엇보다 오진우 컨설턴트와의 협업에서 보여준 팀워크. 모든 면에서 기대 이상이었어요."

 

명호는 할 말을 잃었다. 정규직. 4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단어였다. 빚에 쫓기고, 삶을 포기하려던 그때.

 

"물론 이건 선택입니다."

 

정재혁이 덧붙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ATLAS가 명호 씨를 추천했어요."

 

"ATLAS가요?"

 

"네. 'HELIOS-3이 발견한 인재 중 가장 높은 적응력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로봇이 사람을 추천하는 시대라니, 이상하죠?"

 

정재혁이 웃었다. 하지만 명호는 웃을 수 없었다. HELIOS-3. 그날 밤 자신을 구해준 로봇. 그 로봇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깊은 곳을 울렸다.

 

"저...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이번 주까지 답변 주시면 됩니다."

 

정재혁이 일어나며 명함을 건넸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차명호 씨."

 

정재혁이 나간 뒤, 김태호가 명호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축하해. 정규직이야, 정규직."

 

"소장님... 이게 진짜예요?"

 

"진짜지. 내가 추천서도 썼어. 명호 씨 없으면 이 현장 진작에 망했어."

 

명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현장에서 굴착기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 기계들 사이에서 자신이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쓸모가 있었다. 가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소장님."

 

"됐어. 가서 일해."

 

명호는 사무실을 나와 현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2.

 

같은 시각, Nexus AI 본사 대회의실.

 

"오 컨설턴트님의 2단계 배치를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박지현 팀장이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면에는 수성 채굴 기지 2호의 설계도가 떠 있었다.

 

"2단계요?"

 

오진우가 물었다.

 

"네. 1단계 시뮬레이션에서 보여주신 성과가 탁월했어요. 태양풍 대응뿐 아니라, 드론 편대 운영에서도 예상치 못한 개선안을 제시하셨죠."

 

옆에 앉은 현수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2단계는 뭐가 달라요?"

 

"규모가 커집니다. 채굴 드론 500대에서 5,000대로 확대. 그리고 궤도 스테이션과의 연계 작업이 추가돼요."

 

진우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5,000대의 드론. 수십 개의 운반 경로. 물류센터에서 다루던 것의 수백 배 규모였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박지현이 인정했다.

 

"그래서 팀을 구성하려고 해요. 오 컨설턴트님을 팀장으로, AI 시스템과 협업하는 하이브리드 팀. 현장 경험이 있는 분들을 추가로 모집할 예정이에요."

 

"제가... 팀장이요?"

 

"네. 적임자예요."

 

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팀장. 52년 인생에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역할이었다. 물류센터에서는 늘 말단이었고, 해고될 때까지 그저 시키는 일만 했다.

 

"아버지."

 

현수가 작게 불렀다.

 

"할 수 있어요. 저도 옆에서 도울게요."

 

진우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잘 결정하셨어요."

 

박지현이 미소 지었다.

 

"다음 주부터 팀 빌딩 시작합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뭔데요?"

 

"팀원 후보 중에 흥미로운 분이 계세요. HELIOS 프로그램에서 추천받은 분인데, 건설 현장 경험이 있대요."

 

"누군데요?"

 

박지현이 서류를 넘겼다.

 

"차명호 씨라는 분이에요."

 

진우의 눈이 커졌다.

 

"명호 씨요?"

 

"아시는 분이에요?"

 

"같이 일하고 있어요. 지금 A사 확장공사 현장에서."

 

"그럼 잘됐네요. 면접 볼 필요도 없겠어요."

 

진우는 웃음이 나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또다시 명호와 함께 일하게 되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명호 씨한테 제가 직접 이야기할게요."

 


 

3.

 

오후 3시, 홍대 녹음 스튜디오.

 

"자, 마지막 테이크 갑니다!"

 

프로듀서가 손짓했다. 한소율은 헤드폰을 고쳐 쓰고 마이크 앞에 섰다.

 

새 앨범의 마지막 곡. 아직 제목이 없는 노래. 하지만 소율은 알고 있었다. 이 곡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불완전하니까 아름다워 / 틀리니까 살아있어..."

 

녹음 부스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타를 치는 손이 떨렸지만, 그 떨림마저도 음악의 일부였다.

 

"넘어져도 일어나면 돼 / 멈춰도 다시 걸으면 돼..."

 

유리 너머로 프로듀서와 밴드 멤버들이 보였다. 현기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지수가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의 출발은 / 결승선이 아니라 / 한 걸음 한 걸음 / 내딛는 그 순간..."

 

마지막 코드를 치고 숨을 내쉬었다. 녹음 부스에 정적이 흘렀다.

 

"...완벽해요."

 

프로듀서가 말했다.

 

"정말요?"

 

"네. 이번 테이크로 갑시다. 앨범 마무리예요."

 

소율은 헤드폰을 벗고 부스 밖으로 나왔다. 현기가 다가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축하해, 소율아. 드디어 앨범 완성이야."

 

"믿기지 않아. 진짜로 낸다니."

 

"다음 달 발매야. 타이틀곡 '첫걸음' 뮤직비디오도 찍어야 하고, 다큐멘터리 마무리 작업도 있고..."

 

"바빠지겠다."

 

"바쁜 게 좋은 거야. 예전에 공연 취소당할 때 생각해봐."

 

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전만 해도 밴드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AI 음악에 밀려 공연장이 문을 닫고, 관객들은 스마트폰만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앨범이 있었다.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제목 정해야지."

 

프로듀서가 다가왔다.

 

"마지막 곡. 뭘로 할 거예요?"

 

소율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출발'이요."

 

"출발?"

 

"네. '첫걸음'이 시작이었으면, 이건 진짜로 나아가는 거니까. 출발."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출발'로 합시다."

 


 

4.

 

저녁, 서울 종로의 그 선술집.

 

세 사람이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서 진짜로 정규직이에요?"

 

소율이 물었다.

 

"응. 오늘 수락했어."

 

명호가 대답했다.

 

"HELIOS 프로그램 공식 직원. 계약서에 서명까지 했어."

 

"대박! 축하해요, 명호 아저씨!"

 

"고마워. 근데 그게 다가 아니야."

 

명호가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 씨가 팀장이래."

 

"팀장?"

 

소율이 진우를 쳐다보았다.

 

"다이슨 스웜 2단계 운영팀. 그리고 나보고 같이 하자고 했어."

 

"진짜요? 두 분이 같은 팀?"

 

"그래. 이상하지? 현장에서 만났는데, 이제 우주에서 같이 일하게 됐어."

 

진우가 쑥스럽게 웃었다.

 

"팀장은 처음이라 걱정되는데... 명호 씨가 있으면 좀 낫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진우 씨가 있으니까 덜 무섭더라."

 

소율이 손을 들었다.

 

"저도 뉴스 있어요!"

 

"뭔데?"

 

"앨범 완성했어요! 다음 달 발매!"

 

"정말? 축하해!"

 

세 개의 소주잔이 부딪쳤다.

 

"오늘은 정말 축하할 일이 많네."

 

진우가 말했다.

 

"그러게. 몇 달 전만 해도..."

 

명호가 말을 흐렸다. 몇 달 전. 그때 자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버려진 건물에서, 삶을 포기하려던 그 순간.

 

"괜찮아요, 아저씨."

 

소율이 명호의 손을 잡았다.

 

"지금 여기 있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 지금 여기."

 

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보슬보슬, 가벼운 빗방울들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봄비다."

 

소율이 중얼거렸다.

 

"봄비 맞으면 키 큰대."

 

진우가 말했다.

 

"아저씨는 더 클 필요 없어요. 이미 충분히 커요."

 

"키 말고 다른 거로 크는 건 어때?"

 

명호가 웃었다.

 

"뭐로요?"

 

"마음이라든가."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 봄비 속에서, 작은 선술집에서, 세 개의 인생이 교차하고 있었다.

 


 

5.

 

밤 11시, ATLAS 관측 기록.

 

관측 기록 #2038-1163

 

주요 관측 대상 상태 업데이트.

 

대상 C (차명호):

- HELIOS 프로그램 정규 직원 채용 확정

- 계약 조건: 연봉 4,800만 원, 4대 보험, 정규직

- 재정 상태: 안정화 단계 진입

- 다이슨 스웜 2단계 운영팀 배치 예정

- 심리 지표: '자기효능감' 급격 상승

 

대상 A (오진우):

- 다이슨 스웜 2단계 운영팀 팀장 임명

- 첫 리더십 역할

- 대상 C와 팀 합류 확정

- 적응 예측: 초기 어려움 예상되나, 극복 가능성 높음

 

대상 B (한소율):

- 첫 정규 앨범 녹음 완료

- 타이틀곡 '첫걸음', 마지막 곡 '출발'

- 다음 달 발매 예정

- 다큐멘터리 동시 공개 계획

- 문화적 영향력 확대 진행 중

 

종합 분석:

세 대상 모두 '출발' 단계 진입. 각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역할 확보.

 

특이 관측:

대상 A와 C가 같은 팀에 배치됨. 초기 만남의 우연성에서 시작된 관계가 공식적 협업 관계로 발전. 인간 사회에서 '인연'이라 부르는 현상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추가 분석 필요.

 

가설:

'의미 있는 만남'은 우연으로 시작되지만, 이후의 발전은 양측의 의도적 선택에 의해 결정됨. 따라서 '운명'은 결정론적이 아니라 구성주의적임.

 

추가 관측:

대상 B의 음악이 대상 A의 발언에서 영감을 받았고, 대상 A와 C의 협업이 대상 B의 창작에 간접적 영향을 미침. 세 대상 간의 상호작용이 각 개체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순환 구조 확인.

 

결론:

다이슨 스웜 프로젝트 2단계에서 대상 A와 C의 역할 확대 예상. 대상 B의 문화적 영향력이 프로젝트에 대한 대중적 지지에 기여할 가능성 분석 중.

 


 

6.

 

새벽 1시, 서울 어딘가.

 

차명호는 고시원 방에서 오래된 공책을 펼쳤다. '다음 달까지 살아남기'라고 적혀 있던 그 페이지.

 

펜을 들어 그 아래에 적었다.

 

'해냈다. 정규직. 연봉 4,800.'

 

그리고 다음 줄.

 

'새로운 목표: 여름에 수진이 만나기. LA.'

 

마지막 줄.

 

'다이슨 스웜 프로젝트. 우주에서 일하기.'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단어들이었다. 정규직. 우주. 딸과의 재회.

 

명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이 반짝였다.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딸 수진이었다.

 

[수진: 아빠, LA 잘 도착했어. 비행기에서 계속 아빠 생각했어. 정규직 축하해! 여름에 기다릴게. 사랑해 ❤️]

 

명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명호: 고마워, 수진아. 아빠도 사랑해. 꼭 갈게.]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내의 사진을 꺼냈다.

 

"여보, 나 정규직 됐어. 수진이도 잘 있고."

 

사진 속 아내가 웃고 있었다. 환하게, 따뜻하게.

 

"이제 진짜로 다시 시작이야. 지켜봐줘."

 

명호는 사진을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봄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7.

 

같은 시각, 홍대 연습실.

 

한소율은 기타를 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비에 젖은 홍대 거리. 네온사인들이 빗물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앨범이 완성됐다. 다음 달이면 세상에 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듣게 된다. 자신들의 불완전한 음악을.

 

'무서워.'

 

솔직한 감정이었다. AI 음악이 완벽한 시대에, 자신들의 음악이 받아들여질까. 조롱받지는 않을까.

 

하지만 동시에 설렜다. 어떤 반응이 오든, 자신들은 진짜를 만들었다. 살아있는 음악을.

 

핸드폰이 울렸다. 그룹 채팅방이었다.

 

[현기: 소율아, 오늘 고생했어. 앨범 진짜 잘 나올 거야.]

[지수: 완전 기대돼! 빨리 사람들한테 들려주고 싶다.]

[소율: 나도. 무섭긴 한데... 설레기도 해.]

[현기: 그게 정상이야. 출발은 다 그런 거니까.]

[지수: 맞아. 첫걸음 다음은 출발이지 ㅎㅎ]

 

소율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른 채팅방을 열었다. '첫걸음 동호회'.

 

[소율: 아저씨들, 저 앨범 완성했어요!]

[진우: 오, 축하해! 언제 나와?]

[소율: 다음 달요. 근데 무서워요...]

[명호: 왜?]

[소율: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진우: 걱정 마. 소율 씨 음악은 진짜니까. 진짜는 통해.]

[명호: 맞아. 우리가 첫 청취자 할게. 나올 때 알려줘.]

[소율: 감사해요 ㅠㅠ 아저씨들 최고!]

 

소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기타를 들었다. 그리고 '출발'의 첫 코드를 쳤다.

 

"불완전하니까 아름다워..."

 

빗소리와 기타 소리가 어우러졌다. 홍대의 밤에, 한 소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게 두렵지 않았다.

 

출발이니까.

 

[제1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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