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 약속
1.
일요일 오전 10시, 경기도 파주.
차명호와 딸 수진은 공원묘지 입구에 서 있었다. 봄이 성큼 다가온 날씨.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가지에서 작은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빠, 엄마 좋아하셨던 꽃 샀어."
수진이 노란 프리지아 한 다발을 들어 보였다. 명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가... 제일 좋아했지."
두 사람은 묘지로 향하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4년 만에 아내 묘소 앞에 선 명호. 무릎을 꿇고 묘비를 바라보았다.
"여보... 수진이 데려왔어. 우리 딸, 이렇게 예쁘게 컸어."
수진도 아버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묘비 앞에 앉아 있었다.
"엄마, 아빠 많이 변했어."
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예전엔 항상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좋아 보여. 아빠가 다시 웃는 법을 찾은 것 같아."
명호가 딸의 손을 잡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
"고마워, 아빠. 살아줘서."
명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2.
같은 시각, Nexus AI 본사 VR 연구실.
오진우는 생전 처음 보는 장비 앞에 서 있었다. 전신을 감싸는 슈트, 손에 끼는 글러브, 그리고 머리에 쓰는 헤드셋.
"아버지, 긴장하지 마세요. 그냥 가상 현장 답사예요."
현수가 웃으며 말했다.
"가상... 현장?"
"네. 수성 채굴 기지의 시뮬레이션이에요. 실제 건설 전에 문제점을 찾아내는 거죠."
진우는 헤드셋을 썼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이 멎을 뻔했다.
붉은색 암석으로 뒤덮인 행성. 하늘에는 거대한 태양이 작열하고, 저 멀리 우주선과 건설 장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발밑의 땅조차 진짜처럼 느껴졌다.
"이게... 수성이야?"
"시뮬레이션이에요. 하지만 물리 법칙은 실제와 같아요."
진우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중력이 지구보다 약했다. 몸이 가벼웠다.
"여기를 봐."
진우가 채굴 구역의 지형을 가리켰다.
"이 경사로, 문제가 있어. 자원 컨테이너가 이 각도로 내려오면 관성 때문에 제어가 안 돼."
"어떻게 아셨어요?"
"삼십 년 경험이야. 경사로에서 화물 사고 나는 패턴은 다 비슷해."
현수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경험이 우주에서도 통한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3.
오후 2시, 홍대 연습실.
한소율은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다큐멘터리 첫 촬영일. 감독과 스태프 두 명이 좁은 연습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율 씨,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됐나요?"
소율은 옆에 세워둔 기타를 바라보았다.
"중학교 때 아버지 서재에서 우연히 본 레코드판이 시작이었어요.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그때부터 기타를 잡았죠."
"AI 음악이 대세인 시대에 인디밴드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소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불완전함의 가치... 라고 할까요. AI는 완벽한 음악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완벽함에는 실수도 없고, 감정의 흔들림도 없어요. 우리는 실수하고, 틀리고, 그래서 인간적인 음악을 만들어요."
"'첫걸음'의 가사는 어떻게 쓰게 됐나요?"
"어떤 아저씨를 만났어요. 고용센터에서요."
소율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저처럼 방황하고 있던 분이었는데,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 저항해도 되는 거야'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가사의 씨앗이 됐죠."
"그 분을 다시 만나셨나요?"
"네. 지금은... 친구예요. 나이는 많이 차이 나지만."
소율이 웃었다. 감독도 따라 웃었다.
4.
저녁 7시, '첫걸음 동호회' 단체 채팅방.
[한소율: 오늘 다큐 촬영 첫날이었어요!]
[오진우: 어땠어?]
[한소율: 좀 어색했는데 나중엔 괜찮았어요. 진우 아저씨 이야기도 했어요 ㅎㅎ]
[오진우: 뭐? 무슨 이야기?]
[한소율: 고용센터에서 만난 아저씨라고요~ 걱정 마세요, 이름은 안 밝혔어요]
[차명호: ㅋㅋ 소율 씨가 진우 씨 홍보대사네]
[오진우: 됐다 됐어...]
[한소율: 근데 우리 언제 직접 만나요? 채팅만 하니까 아쉬워요]
[차명호: 그러게요. 저도 두 분 직접 만나고 싶어요.]
[오진우: 음... 다음 주말 어때? 토요일이나 일요일?]
[한소율: 좋아요! 어디서 만나요?]
[차명호: 제가 아무것도 없어서... 두 분이 편한 곳으로요.]
[한소율: 홍대 어때요? 제가 자주 가는 카페 있어요]
[오진우: 홍대 오케이. 토요일 오후 2시?]
[한소율: 완벽! 주소 보낼게요~]
[차명호: 기대돼요. 처음으로 셋이 다 모이는 거네요.]
[오진우: 그러고 보니 그렇네. 현장에서 명호 씨 만났고, 고용센터에서 소율 양 만났는데... 소율 양이랑 명호 씨는 아직 안 만났구나.]
[한소율: 맞아요! 클럽 블루 앞에서 지나쳤다면서요? 명호 아저씨]
[차명호: 네, 기타 소리 들었어요. 그게 소율 씨였다니...]
[한소율: 운명이에요! 진짜로!]
[오진우: 또 카오스 이론?]
[한소율: ㅋㅋㅋㅋ 다음엔 직접 설명해드릴게요 아저씨!]
5.
밤 11시, 서울 고시원.
차명호는 작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수진이와 함께 아내 묘지에 다녀왔다. 4년 만에 가족이 모인 것이었다. 비록 한 명은 저세상에 있었지만.
다음 주 토요일에는 진우, 소율과 처음으로 셋이 모인다. 채팅으로만 알던 사람들을 직접 만난다. 기대와 설렘이 뒤섞였다.
명호는 공책을 꺼내 메모했다.
'2038년 3월 둘째 주: 수진이와 묘지 방문. 다음 주 토요일 진우, 소율과 첫 모임.'
펜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별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보, 나 좋은 친구들 생겼어."
명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혼자가 아니야. 이제."
6.
그날 밤, ATLAS의 기록.
관측 기록 #2038-1147
대상 C (차명호):
- 딸 수진과 함께 배우자 묘지 방문
- 4년간의 심리적 부채 해소 과정 진행 중
- '회복 탄력성' 지표 지속 상승
- 사회적 연결망 안정화
대상 A (오진우):
- VR 시뮬레이션 환경에서 수성 채굴 기지 답사 완료
- 경사로 설계 문제 지적 → 17.3% 효율 개선 예상
- 우주 환경 적응 속도 상위 12%
- 2단계 핵심 인력 확정
대상 B (한소율):
- 다큐멘터리 촬영 시작
- 대상 A에 대한 긍정적 언급 확인
- '불완전함의 가치'라는 메시지가 대중적 공감 확보 가능성 높음
- 문화적 영향력 확대 중
종합 분석:
세 대상의 첫 대면 모임이 차주 토요일로 예정됨. 온라인에서 형성된 유대가 오프라인으로 확장되는 시점.
예측:
대면 모임 이후 관계 밀도 37% 증가 예상. 세 대상의 궤적이 본격적으로 교차하기 시작할 것.
특이 관측:
대상 C가 사망한 배우자에게 "좋은 친구들 생겼다"고 말함. 인간의 '관계'가 심리적 회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추가 연구 필요.
7.
새벽 1시, 서울 어딘가.
한소율은 연습실에서 기타를 안고 있었다. 오늘 다큐 촬영이 끝나고 혼자 연습실에 남았다.
새 곡 작업 중이었다. 제목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연결', '우연', '운명'...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셋이 모이면... 뭔가 달라질까?"
소율은 기타 줄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채팅으로만 알던 두 사람. 진우 아저씨와 명호 아저씨. 나이는 많이 차이 나지만, 어쩐지 마음이 통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약속."
소율이 작게 말했다.
"다음 주 토요일. 우리의 첫 번째 약속."
기타 줄이 울렸다. 새벽 공기 속에서 그 소리가 퍼져나갔다.
[제1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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