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11화 - 재회

우주관리자 2026. 2. 21.

[2부 - 새로운 세계]

제11화 - 재회

 

 

1.

 

토요일 오전 10시,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차명호는 도착 게이트 앞 벤치에 앉아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LA행 비행기가 도착한 지 삼십 분이 지났다. 입국 심사와 수하물 찾는 시간을 고려하면 곧 수진이가 나올 것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4년. 1,460일. 그 긴 시간 동안 딸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내 장례식장에서였다. 빚 독촉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된 이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그날.

 

'수진아, 미안해.'

 

명호는 마음속으로 수백 번 연습했던 말을 다시 되뇌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면 그 말이 나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게이트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즈니스맨, 가족 단위 여행객, 유학생들. 명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빼고 그들 사이를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젊은 여성.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내린 모습. 4년 전보다 어른스러워졌지만, 눈매는 그대로였다. 아내를 닮은 그 눈.

 

"수진아..."

 

명호의 입술에서 딸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목소리가 떨렸다.

 

수진이도 아버지를 발견했다. 멈칫. 캐리어를 멈추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했다. 세상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

 

수진이 천천히 걸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러다 참지 못하고 달려왔다.

 

"아빠!"

 

명호의 품에 뛰어든 딸. 명호는 그 작은 몸을 꼭 안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말로 할 수 없는 4년간의 미안함, 그리움, 후회가 그 눈물 속에 다 담겨 있었다.

 

"아빠, 많이 힘들었지?"

 

"응... 미안해, 수진아. 정말 미안해."

 

"나도 미안해. 연락 안 받아서..."

 

"아니야. 네가 미안할 거 없어. 다 아빠 잘못이야."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봤지만, 명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딸의 체온, 딸의 냄새, 딸이 여기 있다는 사실만이 온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2.

 

같은 시각, Nexus AI 본사 대회의실.

 

오진우는 생전 처음 보는 프레젠테이션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태양을 둘러싼 수백만 개의 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다이슨 스웜의 1단계 청사진.

 

"오 컨설턴트님."

 

옆에 앉은 현수가 작게 불렀다.

 

"긴장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할 일은 지구에서 하던 거랑 똑같아요."

 

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구에서 박스 옮기던 일과 수성에서 자원 옮기는 일이 같다니. 아들 말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회의가 시작됐다. 프로젝트 리더는 ATLAS의 대리인이라고 소개된, 이상하게 눈빛이 깊은 중년 여성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ATLAS와 직접 연결된 인터페이스 휴먼이었다.

 

"1단계 목표는 수성 궤도에 자동화 채굴 기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화면이 바뀌며 수성의 표면이 나타났다. 햇볕에 그을린 황량한 암석 행성.

 

"채굴된 자원은 궤도상의 가공 스테이션으로 운반됩니다. 여기서 오 컨설턴트님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진우의 이름이 불렸다. 심장이 쿵 뛰었다.

 

"제가요?"

 

"네. 무중력 환경에서의 자원 운반 동선 최적화입니다. AI가 기본 설계를 하지만, 지구에서 수십 년간 물류 현장을 경험한 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데이터에 없는 변수들을 잡아내는 것이죠."

 

진우는 화면에 뜬 물류 동선도를 바라보았다. 복잡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본질은 똑같았다.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물건을 옮기는 것. 중력이 없다는 것만 다를 뿐.

 

"저기... 이 구간은요."

 

진우가 손을 들었다.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무중력이라 회전 관성이 문제가 될 것 같은데요. 자원 컨테이너가 이 각도로 꺾이면 관성 때문에 경로를 이탈할 수 있어요. 지구에서도 지게차가 급하게 방향 전환하면 화물이 쏟아지잖아요."

 

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ATLAS 인터페이스의 눈이 살짝 깜빡였다.

 

"유효한 지적입니다. 해당 구간의 경사각을 15도 낮추겠습니다."

 

현수가 옆에서 작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진우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별을 향한 프로젝트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

 

 

3.

 

오후 2시, 강남의 한 카페.

 

한소율은 매니지먼트 회사 대표와 마주 앉아 있었다. 옆에는 밴드 리더 현기가 함께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대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40대 중반의 남자. 업계에서 '인디 발굴러'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첫걸음'이 차트에 올라간 건 기적이에요. AI 음악이 상위권을 독점하는 시대에, 인디밴드의 곡이 19위까지 갔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게 지속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반짝 화제가 됐다가 사라지는 곡들이 많거든요."

 

소율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현기가 옆에서 소율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래서 저희가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어요."

 

대표가 서류를 꺼냈다.

 

"앨범 제작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요. 'AI 시대의 인간 음악'이라는 주제로. Null Pointer가 어떻게 불완전한 음악의 가치를 지켜나가는지, 그 과정을 담는 거죠."

 

소율과 현기가 서로를 쳐다봤다.

 

"다큐멘터리요?"

 

"네. 요즘 사람들이 AI 음악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어요. 너무 완벽해서 지루하다는 반응이 많아요. 그런 시대에 불완전함을 당당히 내세우는 밴드, 그게 바로 차별화 포인트예요."

 

소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용센터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 저항해도 되는 거야.'

 

그래. 저항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좋아요. 해보죠."

 

소율이 대답했다. 현기가 놀란 듯 쳐다봤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계약서 검토하고 다음 주에 정식으로 사인하죠."

 

"좋습니다. 좋은 결정이에요."

 

카페를 나서며 소율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고 푸른 하늘. 어딘가에 그 아저씨가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도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4.

 

저녁, 서울 종로의 한 한정식집.

 

차명호와 딸 수진은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4년 만에 함께하는 식사. 어색함과 그리움이 뒤섞인 복잡한 분위기.

 

"아빠, 밥 좀 더 먹어. 많이 말랐어."

 

"응, 많이 먹고 있어."

 

명호는 딸이 차려준 반찬을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아니, 맛보다는 딸과 함께 먹는다는 사실이 더 행복했다.

 

"아빠, 요즘 뭐 해?"

 

"나? 일하고 있어. 건설 현장 관리 보조."

 

"정말? 건강은 괜찮아?"

 

"응. 요즘 많이 좋아졌어. 정규직 될 수도 있대."

 

수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아빠, 잘됐다!"

 

"그래... 많이 늦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거야."

 

명호는 딸의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 아내가 떠나고, 빚에 쫓기고, 자살까지 시도했던 그 어두운 시간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과거가 되고 있었다.

 

"수진아, 나... 엄마 묘지에 갔다 왔어."

 

수진이 멈칫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인사했어.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제 다시 살아보겠다고."

 

"아빠..."

 

"엄마가 용서해줬을까?"

 

수진이 아버지의 손을 꼭 쥐었다.

 

"용서했을 거야. 엄마는 아빠 사랑했으니까."

 

명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5.

 

밤 10시, '첫걸음 동호회' 채팅방.

 

[차명호: 오늘 수진이 만났어요. 4년 만에.]

[한소율: 와!! 어떠셨어요??]

[차명호: 울었어요. 많이.]

[오진우: 잘됐네요. 정말 다행이다.]

[차명호: 진우 씨, 소율 씨, 고마워요. 두 분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한소율: 무슨 말이에요~ 아저씨가 노력한 거죠!]

[오진우: 그래요. 명호 씨가 버텨낸 거예요.]

[차명호: 아니... 혼자였으면 못 버텼을 거예요. 현장에서 진우 씨 만나고, 클럽 앞에서 기타 소리 듣고... 그런 것들이 저를 살렸어요.]

[한소율: 저도 아저씨들 덕분에 '첫걸음' 쓴 거예요. 우리 다 서로한테 힘이 된 거죠 ㅎㅎ]

[오진우: 그렇게 생각하면... 신기하네. 우연히 만났는데.]

[한소율: 우연이 아닐 수도 있어요. 운명!]

[차명호: ㅋㅋ 소율 씨 로맨틱하시네]

[한소율: 로맨틱 아니에요! 과학적 표현이에요! 카오스 이론!]

[오진우: ?]

[한소율: 나비효과 같은 거요. 사소한 인연이 큰 변화를 만든다~]

[오진우: 우리가 나비란 말이야?]

[한소율: 네! 아저씨 나비 날개 달린 거 상상해봐요 ㅋㅋㅋㅋ]

[차명호: ㅋㅋㅋㅋ]

[오진우: 됐다 됐어...]

 

 

6.

 

그날 밤, ATLAS의 기록.

 

관측 기록 #2038-1141

 

2부 '새로운 세계' 시작. 주요 관측 대상 상태 업데이트.

 

대상 C (차명호):

- 딸 수진과 4년 만의 재회 완료

- 심리 상태 급격히 개선

- '회복 탄력성' 지표 상위 3% 진입

- 정규직 전환 확률 94%

 

대상 A (오진우):

- 다이슨 스웜 프로젝트 1단계 미팅 참석

- 첫 회의에서 유효한 기여 제공 (경로 경사각 수정 제안)

- 적응 속도 예상보다 빠름

- 2단계 핵심 인력 배치 가능성 상향 조정

 

대상 B (한소율):

- 매니지먼트 계약 잠정 합의

- 다큐멘터리 제작 결정

- 'AI 시대의 인간 음악'이라는 주제가 대중적 공감 확보 가능성 높음

- 문화적 영향력 확대 예상

 

종합 분석:

세 대상의 연결이 각 개체의 성장을 가속화하고 있음. '의미 있는 관계'가 인간 사회에서 갖는 기능에 대한 이해 심화.

 

특이 관측:

대상들이 자신들의 연결을 '운명' 또는 '나비효과'로 해석함. 과학적으로는 부정확하나, 심리적 유대 강화에 기여.

 

결론:

2부에서 대상들의 역할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 다이슨 스웜 프로젝트와의 연결고리 강화 관측 지속.

 

 

7.

 

새벽 1시, 서울 어딘가.

 

차명호는 고시원 방 창문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많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있었다. 저기, 저 별들 어딘가에.

 

내일 수진이와 아내 묘지에 함께 가기로 했다. 4년 만에 가족이 모이는 것이었다. 비록 한 명은 저세상에 있지만.

 

명호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가족 여행 때 찍은 사진. 아내, 딸, 그리고 자신. 셋 다 웃고 있었다. 행복했던 시절.

 

"여보, 나 다시 시작해볼게."

 

명호는 사진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수진이 잘 키울게. 약속해."

 

창밖에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봄이 오고 있었다. 긴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명호는 사진을 가슴에 품고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잠이 찾아올 것 같았다.

 

 

[제1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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