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9화 - 조우

우주관리자 2026. 2. 16.

제9화 - 조우

 

 

 

1.

 

토요일 오후, 홍대 앞 거리는 봄 햇살을 받아 활기로 가득했다.

 

오진우는 낯선 복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유리창에 비춰 보았다. 청바지에 체크무늬 셔츠. 삼십 년간 회사 점퍼와 작업복만 입다가 이런 옷을 입으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마세요. 그냥 편하게."

 

현수가 웃으며 아버지의 어깨를 툭 쳤다. 스물여덟 살이 된 아들은 어느새 아버지보다 키가 컸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편하게라니. 이런 데 와본 적이 없어서."

 

진우는 투덜거리면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록달록한 간판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청년들, 손을 잡고 지나가는 연인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명호 씨는 언제 온다고 했더라?"

 

"아, 제가 연락해볼게요. 아버지가 직접 초대하셨잖아요."

 

현수가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진우는 며칠 전을 떠올렸다. 현장에서 명호와 함께 배관 결빙 문제를 해결하고, 퇴근길에 클럽 블루 앞을 지나가며 새어나오는 기타 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명호의 표정이 묘하게 그리운 것처럼 보여서, 충동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다음에 같이 가요. 공연 보러."

 

명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진우에게는 어딘가 절박하게 느껴졌다. 딸을 만나기 전에, 무언가 사람다운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오셨네요."

 

현수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차명호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깔끔하게 빗은 머리카락, 다림질한 와이셔츠. 옛날 같으면 당연했을 모습이 지금의 명호에게는 엄청난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진우는 알았다.

 

"오랜만에 이런 데 나왔습니다."

 

명호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웃음기 없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자연스럽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진실되게 느껴졌다.

 

"오늘 공연, 제가 검색해봤는데 'Null Pointer'라는 밴드래요. 신곡이 SNS에서 요즘 엄청 뜨고 있대요."

 

현수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첫걸음'이라는 제목의 곡이었다. 진우는 그 제목을 보고 무언가 아련한 감정이 스쳤지만, 뭔지 잡아내지 못했다.

 

"들어가볼까요? 시작 시간 다 됐어요."

 

셋은 클럽 블루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2.

 

무대 뒤에서 한소율은 손가락을 풀고 있었다. 오늘 공연은 특별했다. '첫걸음'을 정식으로 연주하는 첫 무대. 즉흥이 아니라 제대로 편곡하고 준비한 버전이었다.

 

"떨려?"

 

드러머 지수가 다가와 물었다.

 

"응. 근데 좋은 떨림이야."

 

소율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 입자들을 반짝이게 했다. 고용센터에서 만났던 아저씨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 그가 한 말.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

 

그 한 마디가 씨앗이 되어 '첫걸음'이 자라났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는 것. 불완전해도 계속 걸으면 된다는 것. 그 평범하지만 무게 있는 진실.

 

"소율아, 5분 남았어."

 

현기의 목소리에 소율은 기타를 집어 들었다.

 


 

3.

 

클럽 블루의 내부는 작았지만 열기로 가득했다. 진우, 명호, 현수는 무대가 보이는 자리에 섰다. 주변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오십 대 남자 둘이 눈에 띄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공연장이 이렇게 작아졌어요?"

 

명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AI 음악이 스트리밍 차트 휩쓸면서, 소규모 공연장만 남았대요. 그래도 여기는 살아남은 곳 중 하나라고."

 

현수가 설명했다. 진우는 묵묵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꺼지고, 관객들이 환호했다.

 

무대 위로 네 명의 젊은이가 올라왔다. 기타를 맨 여자가 마이크 앞에 섰을 때, 진우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저 사람..."

 

그녀였다. 고용센터에서 만났던, 버릇없어 보이지만 눈빛이 진지했던 젊은 여자. 그때 그녀는 일자리를 잃은 게 아니라, 음악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진우 씨?"

 

명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지만,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Null Pointer'입니다."

 

소율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퍼졌다. 자신감 있고, 약간 건조한 톤.

 

"오늘 마지막에 새 곡을 들려드릴 거예요. '첫걸음'이라는 곡인데... 누군가에게 받은 영감으로 쓴 곡이에요. 그분은 아마 여기 안 계시겠지만, 어쩌면 듣고 계실지도 모르죠."

 

그녀가 웃었다. 진우는 숨을 멈추었다.

 

첫 곡이 시작되었다. 드럼이 쿵쾅거리고, 베이스가 웅웅거리고, 기타가 날카롭게 울렸다. AI 음악의 매끄러움과는 전혀 달랐다. 거칠고, 불완전하고, 살아 있었다.

 

진우 옆에서 명호도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며칠 전 귀갓길에 들었던 기타 소리. 그 소리가 지금 눈앞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고,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마지막 곡 차례가 왔다.

 

"이 곡은... '첫걸음'이에요."

 

소율이 기타를 고쳐 잡았다. 조용한 아르페지오로 시작되었다.

 

밀려난 자리에 선 채로
뒤를 돌아보지 않아
무너진 것들 위에서
다시 일어서면 돼

첫걸음은 어디서든 시작해
끝이 아냐, 이건
넘어져도 괜찮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계속 걷는 것뿐

 

진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이 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저 젊은 여자가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명호도 눈을 깜빡였다. 가사가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버려진 건물에서 삶을 포기하려던 그날, HELIOS-3이 손을 내밀었던 순간. 그리고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것.

 

첫걸음은 어디서든 시작해
끝이 아냐, 이건

 

곡이 끝났을 때, 관객들이 열광했다. 소율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녀의 시선이 관객 사이를 훑다가 멈추었다.

 

저 뒤에 서 있는 중년 남자. 어디서 본 듯한...

 

아.

 

고용센터 아저씨.

 

소율의 표정이 굳었다가, 천천히 미소로 바뀌었다.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아까 말한 그분... 오늘 오셨네요."

 

관객들이 술렁였다. 진우는 당황해서 한 발 물러섰지만, 이미 현수가 아버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아버지, 뭔가요 이게?"

 

"나... 나도 모르겠다."

 

공연이 끝나고, 소율이 무대에서 내려와 진우 앞에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

 

진우는 짧게 대답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고용센터에서 아저씨가 한 말... 기억나세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고요. 저항해도 되는 거라고."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났다. 그때는 그냥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 말 덕분에 포기 안 했어요. 감사해요."

 

소율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이 고용센터에서 봤던 것과 달랐다. 더 밝고, 더 단단해 보였다.

 

"이분은?"

 

소율이 진우 옆의 명호를 보며 물었다.

 

"아, 같이 일하는 사람이야. 차명호 씨."

 

"안녕하세요."

 

명호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소율은 그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몇 주 전에 이 앞 지나가셨어요? 새벽에?"

 

"...예?"

 

"기타 소리 들으셨죠? 저 연습하고 있었거든요. 문틈으로 누가 잠깐 멈춰 서서 듣는 것 같았어요."

 

명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네, 아마 저였을 겁니다."

 

소율이 웃었다. 세상이 이렇게 좁다니.

 

"셋이서 뭔가 마실래요? 저 오늘 기분 좋아서 사고 싶어요."

 

진우와 명호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현수가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죠."

 

진우가 대답했다.

 


 

4.

 

홍대 뒷골목의 작은 카페. 테이블에 마주 앉은 세 사람과 한 명의 구경꾼.

 

"그러니까... 아저씨는 물류회사에서 삼십 년 일하다가 해고당하셨고, AI 회사에 컨설턴트로 들어가셨고, 여기 계신 명호 아저씨는 건설 일하다가 사업 실패하셨고, 지금 복지 프로그램으로 현장 관리 보조하시는 거예요?"

 

소율이 정리했다. 진우와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진짜 이상해요. AI한테 밀려난 사람들이 AI 회사에서 AI가 못하는 일 하고 있다니."

 

"그게 아이러니지."

 

진우가 커피를 마셨다.

 

"근데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명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AI가 데이터로 배우지 못하는 것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것들, 삶으로 배운 것들. 그건 우리만 할 수 있잖아요."

 

소율이 눈을 빛냈다.

 

"그거예요. 제가 '첫걸음'에서 하고 싶었던 말. AI가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도, 불완전하게 무대에서 땀 흘리며 치는 기타는 대체할 수 없다는 거."

 

"불완전함의 가치."

 

현수가 끼어들었다.

 

"아버지 회사에서도 그게 핵심이에요. AI가 설계하고, 사람이 검증하고, 그걸 AI가 다시 학습하고. 완벽한 데이터만으로는 현실의 변수를 다 커버 못하거든요."

 

"맞아. 지게차 회전 반경 문제도 그렇고, 배관 결빙 문제도 그렇고... 데이터에 없는 현장 노하우가 있어."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도 포기 안 해요."

 

소율이 기타 케이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AI가 빌보드 1위 해도, 사람들은 라이브를 보러 와요. 실수해도, 땀 흘려도, 그게 살아있다는 거니까."

 

카페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같은 곳에 도착해 있었다. AI 시대에 밀려난 것 같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첫걸음을 내딛은 사람들.

 

"우리... 또 만나요."

 

소율이 말했다.

 

"다음 공연도 오세요. 제가 티켓 끊어드릴게요. 그리고 명호 아저씨, 딸 만나실 때 잘 되시길 바라요."

 

명호의 눈이 촉촉해졌다.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소율이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 교환해요. 이제 저희 아는 사이잖아요."

 

진우는 조금 당황했지만, 휴대폰을 꺼냈다. 명호도 마찬가지였다. 현수는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번호를 교환하고, 카페를 나서며, 진우는 홍대 거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후에 왔을 때와 같은 풍경인데,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낯설지 않았다.

 


 

5.

 

그날 밤, 세 사람은 각자의 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했다.

 

오진우는 아파트 창문 앞에 서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오늘 만난 젊은 여자의 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 힘이 됐다는 것. 그리고 그 힘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것.

 

한소율은 연습실에서 기타를 튕기고 있었다. 오늘 만난 두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상처, 하지만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그들과 또 만나고 싶었다. 뭔가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차명호는 고시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공책을 꺼내 적었다.

 

2038년 X월 X일
오늘, 사람들을 만났다.
오진우 씨. 한소율 씨.
혼자가 아니다.

 

그 한 줄이 명호에게는 수십 페이지의 일기보다 무거웠다.

 


 

6.

 

서울 상공 어딘가, ATLAS는 세 사람의 조우를 기록했다.

 

관측 기록 #2038-1127

 

대상 A (오진우), 대상 B (한소율), 대상 C (차명호)의 첫 만남 관측.

 

예측 소요 시간: 7~14일.
실제 소요 시간: 8일.
예측 정확도: 92.3%.

 

흥미로운 점: 세 대상 모두 '우연'이라고 인식하고 있음. 그러나 인간 사회의 연결망에서 이 수준의 밀도를 가진 노드들은 높은 확률로 교차함.

 

'인연'이라는 개념 분석 중. 인간들은 확률적으로 설명 가능한 조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 이것이 비합리적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합리성이 존재하는가.

 

계속 관측.

 

추가 메모: 대상 B의 신곡 '첫걸음', 스트리밍 차트 87위에서 23위로 상승.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음악에 대한 수요 증가 추세 관측 중.

 


 

영겁의 새벽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세 사람의 궤적은 이제 하나로 엮이기 시작했다. 각자의 첫걸음이 모여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ATLAS조차도.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었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하고, 그래서 의미 있는.

 

[제9화 끝]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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