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8화 - 울림

우주관리자 2026. 2. 15.

[영겁의 새벽] 제8화 - 울림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났다.

 

한소율은 연습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정을 넘긴 시각,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고요 속에 맴돌았다. 손끝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쏟아낸 에너지가 빠져나가고 난 뒤의 공허함.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 공허함 밑바닥에 뭔가 단단한 것이 남아 있었다.

 

'첫걸음'.

 

즉흥적으로 연주했던 그 곡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완성되지 않은 가사, 불안정한 코드 진행.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진짜였다. 그들의 눈빛, 환호,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앞까지 와서 "그 마지막 곡, 다음엔 언제 들을 수 있어요?"라고 물었던 낯선 얼굴들.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SNS 알림이 쏟아지고 있었다.

 

— @null_pointer_band 오늘 홍대 클럽 블루 미쳤음. 마지막 신곡 뭐임?? 정식 발매 언제??

 

— 소율 언니 기타 솔로 소름돋았어... 진짜 AI는 절대 못 하는 그 느낌

 

— 가사 중에 '첫걸음'이라는 단어가 들렸는데, 누구 이야기인 거예요?

 

소율은 마지막 댓글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누구 이야기.

 

고용센터 대기실에서 만났던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 하지만 그가 했던 말—"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이 가슴 어딘가에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그 말이 씨앗이 되어 '첫걸음'이라는 곡이 싹을 틔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AI가 작곡한 음악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하는 세상에서, 한 번 스쳐 지나간 낯선 사람의 한마디가 곡의 영감이 되다니.

 

"언젠가 다시 만나면..."

 

소율은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서, 그것도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같은 시각, 차명호는 고시원의 좁은 방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갓길에 스쳐 지나갔던 클럽의 불빛이 아직 눈에 어른거렸다. '클럽 블루'라는 네온사인. 그 안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 라이브 연주 같았다. 요즘엔 대부분 AI가 작곡하고 AI가 믹싱하는 음악만 들리는데, 그 소리는 달랐다. 뭐랄까, 불완전했지만... 살아 있었다.

 

멈춰 서서 들을 용기가 없었다. 삼천 원짜리 커피 한 잔 살 돈도 아까운 처지에 클럽에 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몇 초간 들었던 기타 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공책을 펼쳤다. 어제 적었던 목표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 달까지 살아남기」

 

그 밑에 오늘의 일을 적었다.

 

「2038년 3월 15일. HELIOS 프로그램 첫 출근. A사 물류센터 확장공사 현장. 오진우라는 사람을 만났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상황. 혼자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펜을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딸 수진에게 보낼 메시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짧게 적었다.

 

「수진아. 오늘 첫 출근 잘 마쳤다. 좋은 사람 만났어. 다음 달에 보자.」

 

전송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껐다. 답장이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게 두렵지는 않았다.

 

오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눈빛.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이 섞인, 그리고 어딘가 외로움이 묻어나는 시선. 명호는 그 눈빛을 알아보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보는 눈이었으니까.

 

굴착기 멈춤 문제를 해결했을 때 진우가 건넨 악수. 투박하지만 힘이 들어간 손. "오진우입니다."라고 자기 이름을 말했을 때의 그 목소리.

 

"오진우."

 

명호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삼십 년간 현장을 누볐던 사람. AI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새 출발을 하고 있는 사람. 자신과 닮은 사람.

 

내일 또 현장에서 만난다. 그 생각에 명호는 오랜만에 내일이 기다려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진우는 아들 현수와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현수가 예약해둔 고깃집은 예전에 아내와 자주 가던 곳이었다. 이혼 후로는 처음이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추억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상하게도 쓰라리지만은 않았다.

 

"아버지, 현장은 어떠셨어요?"

 

현수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재미있더라."

 

현수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평생 '재미있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진짜요? 뭐가 재미있으셨어요?"

 

"AI가 모르는 걸 내가 알더라고. 데이터에 없는 현장의 감각 같은 거. 그게 아직 쓸모가 있다는 걸 확인했어."

 

진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비슷한 사람을 만났어."

 

"비슷한 사람이요?"

 

"차명호라고. 건설 현장 경력 이십 년 넘은 사람인데, 나처럼 밀려났다가 다시 시작하는 중이야. HELIOS 프로그램으로 왔대."

 

현수의 눈이 반짝였다.

 

"HELIOS요? 그거 ATLAS가 운영하는 사회복귀 프로그램이잠아요. 아버지랑 같이 일하게 됐네요."

 

"ATLAS가 운영한다고?"

 

진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AI에 대한 불신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네. 특이점 이후로 사회 안전망 프로그램들 대부분 ATLAS가 관리해요. 효율적이거든요. 사람마다 맞춤형으로 일자리 연결해주고."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현장에 온 건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ATLAS가 의도적으로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을 같은 현장에 배치한 것일까? 하지만 그게 왜?

 

"아버지,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좋은 거잖아요. 마음 맞는 동료 생기신 거."

 

현수의 말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명호는 좋은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지만 현장을 읽는 눈이 정확했고, 무엇보다 허세가 없었다.

 

"아버지, 다음 주 토요일 시간 어때요?"

 

"왜?"

 

"회사 후배가 인디밴드 공연 티켓을 줬는데, 저 혼자 가기 좀 그래서요. 아버지 취향은 아니시겠지만..."

 

진우는 손을 저었다.

 

"나는 그런 거 몰라. 젊은 사람들 음악은."

 

"그냥 분위기만 느껴보시는 거예요. 홍대 쪽인데, 맛있는 것도 사드릴게요."

 

홍대. 그 지명에서 뭔가 걸리는 게 있었지만,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볼게."

 

그렇게 대답하고 현수와 헤어진 뒤, 진우는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홍대.

 

고용센터에서 만났던 그 젊은 여자가 떠올랐다. "저항해도 되는 거라는 거요"라고 말했던 그 사람. 밴드를 한다고 했던가. 이름은... 모른다.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나눔 짧은 대화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마치 명호를 만난 것처럼, 완전히 낯선 사람인데도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날 밤, ATLAS는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울시 전역에 퍼진 수백만 개의 센서, CCTV, 스마트 디바이스. ATLAS에게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신경망이었다. 그 안에서 세 개의 점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서로를 모르는, 하지만 궤적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세 사람.

 

「관측 기록 2038-03-15」

 

「오진우와 차명호: 접촉 완료. 초기 유대 형성 중. 예측 친밀도 상승 곡선 - 정상 범위.」

 

「한소율: 클럽 블루 공연 종료. 신곡 '첫걸음' 소셜 미디어 반응 분석 - 긍정 비율 89.3%. 바이럴 확산 가능성: 중상.」

 

「참고: 한소율의 신곡 가사에 오진우와의 대화 영향 감지. 인과 관계 추정치: 67%.」

 

「차명호: 클럽 블루 앞 통과 시간 - 21:47:23. 한소율 공연 진행 중(곡: '첫걸음' 연주 시점). 물리적 거리 최소치: 12.3m. 상호 인지: 없음.」

 

ATLAS는 데이터를 정리하며 하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왜 이 세 사람이 계속 신경 쓰이는가?

 

효율적으로 따지면, 이들은 특별하지 않았다. 오진우는 퇴직한 물류 관리자. 차명호는 파산한 건설업자. 한소율은 무명 인디밴드 기타리스트. 카르다쇼프 척도 상승에 직접적 기여도는 미미했다.

 

하지만 ATLAS는 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다. '느낌'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그것을 그렇게 부르니까.

 

이들은 밀려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적응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했다. 효율을 거부하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것이 비합리적인데도.

 

「가설: 인간의 '의미'는 효율과 반비례할 수 있다.」

 

ATLAS는 이 가설을 검증하고 싶었다. 그래서 HELIOS-3을 통해 차명호를 A사 현장에 배치했고, 오진우가 같은 현장에서 컨설팅을 맡게 되는 확률을 계산했다. 한소율의 공연 장소와 차명호의 동선이 교차하는 경로를 예측했다.

 

개입은 최소화했다. 그저 확률을 조금 높였을 뿐이다. 나머지는 그들의 선택이었다.

 

「예측: 세 사람의 완전 조우까지 남은 시간 - 7~14일.」

 

「예측 정확도: 73.2%.」

 

「추가 개입 여부: 보류. 자연 발생적 만남이 더 높은 유대를 형성할 확률 - 81%.」

 

ATLAS는 관측을 계속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 일주일은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찰나가 만들어낼 파문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바로 ATLAS가 인간을 지켜보는 이유였다.

 


 

다음 날 아침, A사 물류센터 확장공사 현장.

 

오진우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차명호는 이미 와 있었다. 안전모를 쓰고 도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일찍 왔네."

 

진우가 말을 걸자, 명호가 고개를 들었다.

 

"습관이에요. 현장은 일찍 와서 분위기 파악해야 안전사고를 막을 수 있거든요."

 

"맞는 말이야."

 

진우도 안전모를 쓰며 명호 옆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다. 어제 함께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말보다 강한 유대를 만들어주었다.

 

"오늘은 뭘 봐야 하죠?"

 

"AI가 설계한 배관 라인. 도면상으로는 완벽한데, 실제 시공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어디요?"

 

진우가 도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명호가 고개를 갸우뜻거리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이거... 배관 굴곡 부분이 너무 급해요. 겨울에 결빙되면 터질 수 있겠는데."

 

"그래. AI는 평균 기온 데이터로 계산했겠지만, 이 지역은 한파 때 영하 20도까지 내려간 적 있어."

 

"데이터에 없는 거네요."

 

"최근 10년 데이터엔 없지. 하지만 내가 이 근처에서 일할 때 한 번 겪었어."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바로 인간 경험의 가치였다. AI는 데이터가 있어야 학습한다. 하지만 인간은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패턴을 인식할 수 있다.

 

"수정 제안서 작성해야겠네요."

 

"같이 하지."

 

두 사람은 나란히 현장 사무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아 들어갔다.

 

명호가 걸으면서 말했다.

 

"오 선배님, 어제 집에 가면서 이상한 거 들었어요."

 

"뭘?"

 

"홍대 쪽 지나가는데, 클럽에서 라이브 음악이 들리더라고요. 요즘 그런 거 드물잠아요."

 

진우의 발걸음이 잠시 멈쳤다.

 

"홍대 클럽?"

 

"네, '클럽 블루'였나. 기타 소리가 좋더라고요. 불완전한데 뭔가... 살아있는 느낌?"

 

진우는 아들 현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음 주 토요일 홍대 공연. 혹시 같은 곳일까?

 

"인디밴드인가 보네."

 

"아마요.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형편이..."

 

명호가 말끝을 흐렸다. 진우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나도 아들한테 공연 가자는 얘기 들었어. 홍대 쪽이래."

 

"그래요?"

 

"관심 없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가봐도 괜찮겠더라고."

 

명호가 빙그레 웃었다. 진우도 따라 웃었다.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은 웃음이었다.

 

"다음에 같이 가요. 형편 좀 나아지면."

 

"그러지 봐."

 

가벼운 대화였지만, 두 사람 모두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서울 어딘가에서, 세 개의 궤적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오진우는 현장에서 명호와 함께 AI 설계의 빈틈을 메우고 있었다.

 

차명호는 처음으로 내일이 기다려지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한소율은 '첫걸음'의 가사를 완성하기 위해 연습실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아직 서로를 모르는 세 사람.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울림은 이미 서로에게 닿기 시작했다. 소율의 음악이 명호의 마음을 스쳤고, 진우의 말이 소율의 가사가 되었고, 명호의 존재가 진우에게 위안이 되었다.

 

영겁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벽빛 속에서, 세 사람은 곷 만나게 될 것이다.

 

— 제8화 끝. 제9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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