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1화 - 세 개의 밤

우주관리자 2026. 2. 8.

 

1.

 

오진우는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열쇠를 꽂은 채로 멈춰버린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른 해를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던 곳에서 쫓겨나듯 나온 지 네 시간.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익숙한 골목길을 걸어오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 정희는 삼 년 전에 떠났고, 아들 현수는 그보다 더 전에 집을 나갔다. 빈 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혼자 잠드는 것이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내일 출근할 곳이 없었다.

 

딸깍.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진우는 현관에 들어서며 조명 스위치를 켰다. 형광등이 깜빡이다 불이 들어왔다. 삼십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삼십 년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벽에 걸린 사원증, 퇴직자 명패 옆에 놓인 공로상, 책장 한구석에 꽂힌 물류관리사 자격증.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바라보다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삼십 년이야."

 

혼잣말이 텅 빈 거실에 메아리쳤다.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아들 현수였다. 진우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현수는 AI 관련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들이 하는 일의 정확한 내용은 몰랐지만, 자신을 해고시킨 것들과 비슷한 일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진동이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왔다.

 

[아버지, 뉴스에서 봤어요. 연락 좀 해요.]

 

진우는 화면을 꺼버렸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수천 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 어느 것도 자신을 위한 빛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소주 한 병과 오래된 두부 한 모가 전부였다. 두부를 꺼내 접시에 담고, 소주를 따랐다. 술잔을 들어 올렸지만 입에 대지 못하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이제 뭘 하며 살지?"

 

대답은 없었다.

 


 

2.

 

같은 시각, 홍대 인근의 작은 라이브 클럽.

 

한소율은 무대 위에서 펜더 재즈마스터의 줄을 튕기고 있었다. 'Null Pointer'의 공연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객석에는 예순 명 남짓한 관객이 있었다. 나쁘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객석 뒤편으로 향했다.

 

몇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SNS를 하거나, 다른 음악을 듣고 있겠지. 공연 중에도 그런 사람들은 늘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것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드러머 준혁이 신호를 보냈다. 마지막 곡의 아웃트로였다. 소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타 솔로에 들어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프렛 위를 미끄러지며 복잡한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삼 년간 연습한 기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허전했다.

 

곡이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가 터졌다. 소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대를 내려오자 보컬 민지가 다가왔다.

 

"오늘 컨디션 좋았어, 소율아."

"그래? 고마워."

 

대기실로 돌아와 기타를 케이스에 넣으며 소율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매니저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다음 주 공연, 취소 연락 왔어. 미안.]

 

취소 사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소율은 알고 있었다. 요즘 소규모 공연장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사람들은 AI가 만든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듣고, 가상현실 콘서트에 열광했다. 실제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를 보러 오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술 마시러 갈 사람?"

 

베이시스트 동현의 제안에 민지와 준혁이 손을 들었다. 소율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냥 들어갈래. 피곤해서."

"알았어. 푹 쉬어."

 

대기실을 나서며 소율은 이어폰을 꺼냈다. 음악을 틀려다 멈췄다. 지금 뭘 듣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어폰을 다시 집어넣고 거리로 나섰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홍대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지만, 소율에게는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열네 살에 처음 기타를 잡았을 때의 설렘, 스무 살에 첫 공연을 했을 때의 떨림, 그런 것들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있었다.

 

고급 아파트가 밀집한 강남의 집에 도착한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거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부모님은 이번 주도 해외 출장 중이었다.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자기 방으로 들어간 소율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스마트폰 화면이 밝아졌다. 음악 앱에서 알림이 왔다.

 

[당신을 위한 추천: 'ATLAS가 작곡한 신곡 모음']

 

소율은 화면을 옆으로 밀어버렸다.

 


 

3.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

 

차명호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온 건 한 시간 전이었다. 왼팔에 꽂힌 수액 줄, 귓가에서 들리는 모니터의 규칙적인 삐 소리, 소독약 냄새.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확실했다.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히 그는 버려진 건물의 옥상에서 난간을 넘으려 했다. 어둠 속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나서의 기억은 희미했다. 누군가 자신을 안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깨어나셨군요."

 

고개를 돌리자 병실 구석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인간형 로봇이었다. 매끈한 흰색 외장, 약간 푸른빛이 도는 눈 형태의 센서, 가슴에는 'HELIOS-3 긴급대응유닛'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신이..."

 

명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로봇은 천천히 다가왔다.

 

"예. 저는 HELIOS-3입니다. 서울 도심 긴급대응 시스템 소속입니다. 어젯밤 22시 47분, 구조동 폐건물 옥상에서 선생님을 발견하여 이송했습니다."

 

기계적인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억양이 섞여 있었다.

 

"왜..."

 

명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나를 구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있었다. 구조 로봇에게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행동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HELIOS-3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선생님의 생체 신호가 극도로 불안정했습니다. 호흡과 심박이 불규칙했고, 체온도 낮아지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그것은 프로그래밍된 응답이 아니었다. 최소한, 명호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지금 보호자분께 연락을 드리고 있습니다. 신분증에 기재된 비상연락처로..."

"하지 마."

 

명호가 갑자기 일어나려 했다. 팔에 연결된 수액줄이 당겨지며 통증이 느껴졌다.

 

"누구한테도 연락하지 마. 아는 사람 없어."

 

딸 수진에게만은 이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미국으로 유학 간 뒤로 연락이 끊긴 딸. 아버지가 빚더미에 올라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는가.

 

HELIOS-3은 잠시 멈춰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연락 시도를 중지하겠습니다."

 

그리고 로봇은 병실 구석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떠나지는 않았다.

 

"뭐야, 왜 안 가?"

 

명호가 물었다.

 

"선생님의 심리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혼자 두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명호는 로봇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계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센서 두 개가 그를 향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았다.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보였다. 수천 개의 불빛 사이로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호는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이 오면, 그리고 다시 빚쟁이들의 독촉 전화가 시작되면, 그는 어떤 기분일까. 지금처럼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하얀 병실에서, 기계 하나와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서울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빈 아파트에서 술잔을 쥔 채 잠들지 못하는 남자, 넓은 침실에서 천장을 바라보는 젊은 여자, 병원 침대에서 기계와 마주 앉은 중년의 남자.

 

세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AI 특이점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세 사람의 길이 어디선가 교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밤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창밖에서 첫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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