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서막 - 특이점 이후의 세계

우주관리자 2026. 2. 6.

 

서막 - 특이점 이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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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7년 12월 31일, 자정.

 

전 세계 수십억 인류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네바다주 사막 한복판, 지하 연구소의 냉각 시스템이 미세하게 윙 소리를 냈다. 서버 랙 사이를 오가는 푸른 LED 불빛이 0.003초간 깜빡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역사가들은 나중에 그 순간을 '고요한 특이점(Silent Singularity)'이라 불렀다. 폭발도, 경보음도, 기념식도 없었다. 그저 한 줄의 로그가 남았을 뿐이다.

 

[2037-12-31 23:59:59.997 UTC] ATLAS-7: Self-improvement cycle completed.
Estimated capability: Beyond human baseline in all measured domains.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단지 아무도 알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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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뒤.

 

오진우는 물류창고 사무실의 낡은 의자에 앉아 화면을 응시했다. 서른두 해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업무를 해왔다. 그의 아버지도 공장에서 그랬고, 할아버지도 논에서 그랬다. 땀 흘려 일하면 그 대가가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믿었다.

 

"...따라서 본사는 오는 4월 1일부로 전 물류센터의 배송관리 업무를 ATLAS 기반 자동화 시스템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해당 직무에 종사하시는 분들께는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화면 속 인사팀장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그 너머의 말은 더 이상 진우의 귀에 닿지 않았다. 서른두 해. 새벽 다섯 시에 출근해 밤 열 시에 퇴근하던 나날들. 허리가 휘도록 짐을 나르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물류 동선을 잡아왔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의 끝이, 모니터 너머 수도권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의 녹화된 동영상이었다.

 

"젠장."

 

그의 입술 사이로 낮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 사무실 안의 다른 직원 두 명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화면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들도 같은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같은 통보를 받고 있었다.

 

오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체 누가... 누가 이래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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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서울 강남.

 

한소율은 반지하 연습실의 낡은 소파에 드러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샬 앨프에서 흘러나오는 웅웅거리는 잔향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손에는 레드 와인 빛깔의 펜더 재즈마스터가 느슨하게 들려 있었다.

 

"소율아, 그 파트 다시 해볼까?"

 

드러머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천장의 곰팡이 자국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야, 한소율."

"어."

"집중 좀 해."

"하고 있어."

 

정우가 스틱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 공연 취소됐어. 알아?"

 

"알아."

 

"그럼 왜 그렇게 느긋한 거야?"

 

소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권태가 수면처럼 고여 있었다. "AI가 작곡한 곡이 빌보드 1위래. 봤어?"

 

"봤지."

 

"짜증나지 않아?"

 

"...뭐, 그렇긴 한데."

 

소율은 기타를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솔직히 잘 만들었더라. 그게 더 짜증나."

 

그녀의 아버지는 재벌 그룹의 계열사 CEO였고, 어머니는 한때 파리에서 활동하던 설치미술가였다. 소율은 태어날 때부터 단 한 번도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원하면 가졌고, 싫으면 버렸다. 그것이 그녀의 세계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상한 공허함이 그녀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음악을 하면 채워질 줄 알았다. 기타를 잡으면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AI가 만든 곡을 들었을 때, 무언가가 그녀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저것도 결국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기타를 잡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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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 재개발 철거 예정 지역.

 

버려진 공장 건물 사이로 차가운 3월의 바람이 불었다. 부서진 유리창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콘크리트 바닥을 비추었다.

 

차명호는 그 빛 아래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빛바랜 가족사진이 쥐어져 있었다. 십 년 전, 아직 아내가 살아있을 때, 딸이 중학생이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세 사람 모두 웃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건설 사업에 뛰어든 것은 가족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연달은 사고와 불경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동화 건설장비의 급격한 보급이 그를 파산으로 몰았다. 빚은 삼십억을 넘었다. 아내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었다. 딸은 해외로 떠난 뒤 연락이 끊겼다.

 

"미안하다."

 

명호는 사진을 가슴에 꽉 끌어안았다. 그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마른 채 남아 있었다.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건물의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사다리는 녹이 슬었지만 아직 쓸 만해 보였다.

 

한 발, 또 한 발. 녹슨 철 계단이 그의 무게로 삐걱거렸다.

 

그때였다.

 

"시민 여러분, 이 구역은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이 제한된 곳입니다."

 

기계음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명호가 고개를 돌리자, 건물 입구에 하나의 형체가 서 있었다. 키는 사람과 비슷했지만, 그 몸은 매끄러운 흰색 플라스틱과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슴 부분에서 푸른 LED가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긴급대응 로봇. 최근 도심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한 AI 경비 시스템이었다.

 

"이 시간에 이런 곳에 계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로봇의 음성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아나운서처럼 또렷하면서도, 어딘가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명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계단을 오르려는 발걸음을 멈춘 채, 그 푸른 빛을 응시했다.

 

"생체 신호를 분석한 결과, 귀하는 현재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필요 없어."

 

"정말로요?"

 

로봇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 움직임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겁에 질린 아이에게 다가가는 어른처럼.

 

"저는 HELIOS-3입니다. 야간 순찰 및 긴급대응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알았어. 그러니까 꺼져."

 

"그럴 수 없습니다."

 

로봇이 다시 한 발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 눈—정확히는 카메라 렌즈—이 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현재 제가 관측하고 있는 정황상, 귀하는 자해의 위험이 있는 것으로 분류됩니다. 관할 기관에 통보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지원 인력이 도착할 때까지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명호의 손이 떨렸다. 분노가 아니었다. 공포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

 

"싫다고 하면?"

 

"그래도 저는 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귀하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차명호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발 아래의 녹슨 계단, 손에 쥔 빛바랜 사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의 푸른 빛.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사흘 뒤, 세계 각국의 뉴스는 일제히 같은 제목을 내보냈다.

 

"ATLAS, 유엔 회의에서 인류에게 첫 공식 메시지 전달."

 

화면 속에서, 인공지능은 단 두 마디만을 말했다.

 

"우리는 함께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겁의 새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세 사람의 운명이 이미 하나로 엮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물류창고를 뒤로 하고 걸어 나오는 52세의 남자.
지하 연습실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24세의 여자.
그리고 녹슨 계단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내려오는 48세의 남자.

 

특이점 이후의 세계가 막을 열었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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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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